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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침없이 하이킥~


내가 본 <지붕 뚫고 하이킥>의 테마는 처음부터 끝까지 '계급'이었다. '준세'니 '지정'이니 하는 사랑 놀음들은 그냥 에피소드를 채우고 시청률을 끌어가기 위한 수단이고 진짜 하고 싶은 이야기는 따로 있었던 것 같다. 그렇지 않았다면 시대에 뒤떨어져 보이는 '식모' 컨셉을 굳이 끌어들이지 않았을 거다. 이 시트콤에서 세경과 신애는 무산계급 그 자체다.

좀 사는 순재네 집안 인물들의 면면은 어떠한가. 순재는 자옥에게 이벤트 하느라고 날린 돈을 메우느라 벼룩의 간을 빼먹듯 세경이의 월급까지 줄일 생각을 하는 인물이고, 현경과 보석 부부는 가장 전형적으로 유산계급의 우월의식과 속물근성을 가진 인물들이다. 이들에게 세경은 그저 집에서 일하는 가정부일 뿐이고 절대 나를 무시해서는 안 되는, 권력관계의 최하층에 속하는 인물일 뿐이다. 갈비를 입에 달고 살고 변비에 시달리며 '다 내꺼야 빵꾸똥꾸들아'를 외치는 버릇없는 해리는 모든 소통 없는 가진 자들의 캐리커처나 다름없다. 이순재의 가족들 중에서 계급의식을 가지고 있지 않은 단 한명의 인물은 고등학생 준혁이 뿐이다. 준혁이 세경에게 주는 도움은 그 어떤 계급의식의 발로도 아닌 첫사랑의 순수한 감정에서 비롯된 것이다.

지훈은 단순한 위에 인물들에 비해 조금 복잡한 캐릭터다. 지훈에게 세경이는 '불쌍한 애'다. 매일 새벽마다 내 사골을 끓여주는 애... 장래가 걱정되고 도와주고 싶은 애... 아직 누구 사귀고 그럴 여유 없는 가난한 애... 그러니까 누가 함부로 건드리지 않게 지켜줘야 하는 애... 지훈은 세경에게 이런 말도 한 적이 있다. 세상을 바꿀 수는 없으니 그 안에서 너도 검정고시 봐서 사다리 타고 한 칸이라도 더 올라가라고... 지훈이 세경을 보는 시선은 계급 안에 갇혀 있다. 그가 생각하는 인생살이의 최선이라는 건 결국 그런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경쟁사회 속에서 살아가는 우리 대부분이 가지고 있는 보편적인 사고방식일 것이다. 지훈이 정음에게 차인 이유 또한 그들의 계급차이 때문이다. 서울대와 서운대의 차이, 돈 많은 의사와 알거지 백수의 차이는 이들에게 극복하기 어려운 벽인 것이다. 그러던 지훈은 세경이 이민을 결정하고 나서야 뒤늦게 자신을 향한 세경의 마음을 알아차린다. 그리고 세경을 청소부라고 무시하면서 하대한 후배에게 화를 내어 놓고는 실은 자기 자신에게 화가 났던 거라고 자책한다. 그는 자신의 무엇 때문에 화가 난 것일까. 혼란스러워 보인다.

마지막 회, 복잡한 마음을 안고 정음의 주소를 알아내어 지방으로 찾아가려던 길에 지훈은 자신이 주었던 돈 봉투를 돌려주고 작별인사를 하러 온 세경을 만난다. 비가 마구 퍼붓는 길에 지훈의 차에 오른 세경은 이민을 결심한 이유로 이런 이야기를 한다. 신애가 언젠가부터 나처럼 쪼그라들고 눈치 보는 것 같아서 마음이 아프다고. 식탐 많은 애가 먹을 것 가지고 눈치 보고, 아파도 병원 갈 비용 걱정하고... 그래서 가난해도 마음껏 자유롭게 뛰어놀 수 있는 곳으로 가고 싶다고. 타이티, 고갱이 여생을 보냈던 낙원의 섬... 계급 따위는 없는 낙원 말이다. 반대로 가기 싫은 이유는 뭐냐고 묻자 세경은 또 이런 말을 한다. "아저씨 말대로 신분의 사다리를 한 칸이라도 올라가고 싶었어요. 그런데 언젠가 또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제가 그 사다리를 죽기 살기로 올라가면 또 다른 누군가가 그 밑에 있겠구나. 결국 못 올라갈 사람의 변명이지만..." 내가 가르쳐 줄 테니 죽기 살기로 올라와 보라던 지훈의 자괴감은 극에 달했을 것이다. 그는 계급의 사다리에서 꼭대기 층에 있다고 함부로 보호자처럼 굴었던 자기 자신의 뼛속 깊은 우월감이 자신이 꾸짖었던 후배의 행태나 다름이 없었다는 사실을 그제야 깨달은 걸지도 모른다. 너무 많이 좋아했다고 처음으로 마음을 드러낸 세경에게 지훈은 이 말 밖에 하지 못한다. "미안하다. 내가 한 말들 때문에... 그게 상처주려고 한 게 아니었는데..."

어쩌면 지훈은 자신의 후배 의사들에게 했던 말처럼 불쌍한 애니까 건드리면 안 된다고 스스로에게 씌운 족쇄 때문에 세경에 대한 진짜 감정을 스스로도 알지 못했던 걸지도 모른다. 긴 고백을 끝낸 세경이 갑자기 시간이 잠시 멈췄으면 좋겠다고 말했을 때, 쭉 앞 유리만 보면서 운전하던 지훈은 그때서야 눈물고인 눈으로 옆에 앉은 세경에게 시선을 돌린다. 아마도 그 순간이야 말로 지훈의 눈에 씌워져 있던 계급주의의 렌즈가 벗겨지고 인간, 여자, 신세경이 보이는 순간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정말 시간은 멈추고, 하이킥도 끝나고, 게시판은 욕으로 도배가 된다...

시간이 멈추었다고 하면 시적인 표현 같지만 앞뒤 정황상 그 둘은 죽었다고 보는 것이 맞다. 계급주의에 순응하는 자신의 엘리트적 속물근성 때문에 세경을 평등한 시선으로 바라보지 못했던 '개자식 이지훈'이 자신의 과오를 뒤늦게 자각하고 세경을 다시 발견하는 순간, 김병욱 피디의 염세주의적인 세계관이 발동해서 그 둘을 저승길로 보내버린 것이다. 그 둘이 잘 되는 것은 현실에선 판타지니까. 아마도 김병욱 피디는 지훈의 캐릭터에 굉장히 감정이입을 많이 했을 것 같다. 부조리한 것은 알지만 바꿀 힘은 없으니 너도 사다리 타고 올라가라는 지훈의 현실적인 태도가 작품 전체와도 닮았으니 말이다. 작품 내에서도 그 부조리는 끝내 전복되지 않고, 계급 차를 뛰어 넘은 사랑을 꿈꾼 것을 마치 단죄라도 하듯이 자기 파괴적인 결말을 맺는다. 로미오와 줄리엣이 죽고 두 집안에 평화가 찾아온 것처럼 이들이 교통사고로 죽는다고 계급 간 평화가 올 것은 아니겠지만...

지금 이 시각 어맹뿌보다도 유인촌보다도 더 많은 욕을 먹고 있는 김병욱 피디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지 궁금하다. 프라임 타임의 시트콤을 만들면서 이렇게 대담한 (반드시 욕먹을) 결론을 내릴 수 있는 배짱이 참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거침없이 하이킥> 때부터 이미 시트콤이 아닌 20-30분짜리 그 어떤 무언가라고 생각하지만...) 그냥 쉽고 안전한 길로 가도 되는데 병이다 싶기도 하고... 어쨌거나 이 결말을 보고 나니 나는 우울해지기보다는 오히려 해머로 머리를 한대 후려 맞은 것처럼 이상하게 시원한 느낌이 들었다. 아니 김 피디, 세상에 이 많은 사람들을 상대로 이런 못된 짓을 할 수 있단 말이야? 와우! 뭐 이런 느낌? 시트콤 결말 하나에 테러라도 맞은 것처럼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동시에 정신적 피해를 입었다고 주장하는 현상 자체가 좀 재미있기도 하다. 막판에 시청자들에게 하이킥 한방 제대로 날린 셈이다.

부족한 점이 많은 시리즈긴 했지만 <거침없이 하이킥> 때문에 기대감을 한 없이 낮추고 보아서 그런지 뭐 나는 그동안 나름 재미있게 보았다. <거침없이 하이킥>이 급격한 하강곡선을 그리고 들쭉날쭉한 에피소드를 선보였다면 <지붕 뚫고 하이킥>은 잔잔하게 쭉 비교적 고른 에피소드를 선보여서 별 거부감은 없었던 것 같다. 결말도 차라리 이게 더 마음에 들고 말이다. 듀나는 라인 타는 결말이라서 별로라고 하던데 진짜 라인 타는 결말은 <거침없이 하이킥>이 아니었나 싶다. <지붕 뚫고 하이킥>의 마지막 회는 오히려 그동안의 멜로가 모두 시청률 유지용 눈속임이 아니었나 싶기도 할 만큼 작품의 완결성을 박살내 버리고서라도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분명해 보였다. 보석의 자살기도 에피소드 때도 웃음기가 전혀 없이 리얼하게 묘사해서 시트콤에 나오기엔 센 장면이라고 생각했는데, 김 피디가 보는 지금의 한국사회가 그만큼 그 어느 때보다도 팍팍한가 보다. 이 시트콤에서 최약자에 속하는 신애가 남의 집에 얹혀 살면서 조금 덜 쪼그라들고 조금 덜 눈치본다고 민폐라며 욕을 들어먹는 사회니 뭐 말 다 했지.